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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손현보 운동’, 기독교 패배주의 넘어설 수 있을까?

Jun 05, 2026

▲기독교 패배주의를 거부하고, 기독교 생태계를 재건하며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증언하는 ‘손현보 운동’. ⓒ챗GPT


[칼럼] ‘이미와 아직’의 공적 신앙과 기독교 생태계 재건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 개혁주의 진영 안에는 일종의 종말론적 체념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공적 영역에서 분투하는 이들을 향해, 오히려 같은 신앙 진영에서 ‘무모한 정치화’, ‘복음을 가로막는 행동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논리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질 것이니,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물론 교회의 세속 권력화와 정치 우상화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정치 프로젝트로 완성되지 않으며, 교회가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간 복음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적 영역에서의 신앙적 책임 자체를 유예하는 것 역시 성경적 균형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예배와 전도에 헌신해 온 지역 목회의 현장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시대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예배 제한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 등 가치 질서의 도전은, 교회가 예배와 전도를 넘어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과 창조 질서 수호를 위한 공적 책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손현보 목사를 중심으로 나타난 이 흐름을 ‘손현보 운동(Pastor Son Movement)’이라 명명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합니다.



‘손현보 운동(Pastor Son Movement)’이란, 교회의 공적 책임을 유예하는 ‘기독교 패배주의’를 거부하고, 가정·사회·교육·문화·공동체 질서 전 영역 속에서 ‘기독교 생태계를 재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증언하는 ‘영역주권적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이 정의가 옳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합니다. 과연 성경적 종말론은 교회에게 세상으로부터의 철수를 명령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끝까지 싸우며 기다리라고 명령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현실론적 패배주의’가 있었습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외부의 박해 이전에 내부의 체념과 먼저 싸워야 했습니다. 세 가지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모세의 출애굽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돌아온 것은 즉각적인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는 더 무거운 노동이 부과됐고,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압제 아래서 조용히 연명하는 편이 낫다는 현실론적 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체념 속에서도 역사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②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성전 재건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시작된 성전 재건은 대적의 방해와 내부의 낙심 속에서 14년간 멈춰버렸습니다. 백성들은 말했습니다. “아직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다.”


이것이 영적 패배주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이유로 사명을 끝없이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다시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성전 재건은 인간적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③ 에스더의 결단


하나님 앞에서만 절하는 모르드개를 향한 하만의 증오는 온 유다인을 절멸 위기에 몰아넣었습니다. 허락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때, 에스더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금식기도를 요청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단하고 왕 앞이라는 공적 영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에스더에게 믿음은 현실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었습니다.


2. ‘손현보 운동’과 현대적 성벽 재건


손현보 운동은 단순한 정치 운동이나 시대적 결집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의 출애굽,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에스더의 결단,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같은 성경적 개혁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핵심은 세상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해야 할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이 운동이 사회운동처럼 보이는 이유는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단순한 방어 구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과 신앙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신앙의 생태계’였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성전도 고립되고, 공동체도 약화되며, 다음 세대 역시 신앙의 토양을 잃게 됩니다.


오늘날 ‘손현보 운동’이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무너져가는 기독교 생태계를 방치한 채 교회만 남겠다는 것은, 성벽이 허물어진 채 성전만 지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교회의 권력화가 복음을 훼손한 사례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적 참여가 곧바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 가능성을 이유로 교회의 공적 책임 자체를 포기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왜곡입니다.


이 운동이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권력 획득이 아닌 증언과 섬김의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 내부의 신학적 성찰과 자기 비판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3. 이미와 아직: 싸우며 기다리는 종말론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은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임했으나, 재림 때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승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확보되었으나, 최종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종말론적 오해는 바로 이 균형이 무너질 때 발생합니다. ‘아직(Not Yet)’만 강조한 나머지, ‘이미(Already)’를 사실상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화는 성경이 예언한 바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니 공적 책임을 포기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깨어 있으라, 끝까지 견디라, 충성하라”.


이는 세상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끝까지 증언하라는 명령입니다. 무천년설이든 전천년설이든 어떤 종말론 체계든, ‘이미와 아직’의 균형을 잃을 때 패배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종말론적으로 붙들 때, 그것은 교회를 공적 책임과 충성의 자리로 이끌게 됩니다.


종말신앙은 행동 포기의 근거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왕의 통치를 증언해야 한다는 긴장된 사명의 근거입니다. 이미 이기신 왕을 섬기는 자는, 최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되 현재의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결론: 교계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손현보 운동’을 단순한 정치적 소음으로 치부할 것입니까, 아니면 시대적 사명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질문으로 받아들일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현재적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왕의 편에서, 그 통치를 증언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진짜 패배는 싸운 끝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보지도 않은 채 패배를 종말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세를 핑계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시대를 장악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 끝까지 충성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충성은 교회 건물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문화와 공동체라는 삶의 전 영역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제 교계는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세를 이유로 공적 책임을 유예할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붙들고 끝까지 싸우며 기다릴 것입니까.


손현보 운동이 한국교회 앞에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안상렬

부산 세계로교회 부목사


출처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